뮤리얼 스파크 ‘운전석의 여자’ 표지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되는 뮤리얼 스파크의 중단편선 ‘운전석의 여자’가 새로 출간됐다. ‘운전석의 여자’는 뮤리얼 스파크가 꼽은 자신의 최고작으로, 11편의 중단편엔 특유의 익살 섞인 시니컬함으로 포착한 여성과 삶에 대한 서늘한 아이러니가 담겼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운전석의 여자’ 주인공 리제는 까탈스럽고 감정 기복이 심하며, 생각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여성이다. 쇼핑 중 점원에게 느닷없이 화를 내고, 상사 앞에서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리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찾아다니는 리제는 그 어떤 해석도 거부한다.
리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동시에 감당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여성의 실존이다. 가부장 사회에서 운전석에 앉은 여자는 위험한 존재이며, 경계의 대상이다. 리제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불안과 긴장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반복하는 리제와 마주친 남자들은 겁을 먹고 시선을 피하거나, 폭력으로 그녀를 응징하려는 양분화된 태도를 보인다.
주변의 비웃음, 남성들의 폭력적 단죄 속에서 리제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합리적이지 않은 리제의 행적과 자신을 죽이라는 그녀의 최후 요청이 정합성을 획득하는 이유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욕망함으로써 자신을 거부하는 세계에 저항한 것이다.
이 책엔 표제작 ‘운전석의 여자’ 외 10편의 단편이 함께 실렸다. ‘치품천사와 잠베지강’은 뮤리얼 스파크가 70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옵서버 단편 소설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이며 ‘아버지와 딸들’, ‘관람 개방’은 여성이 남성을 매개해서만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사회상을 비틀어 모녀, 부부 관계가 무엇을 토대로 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작품이다.
‘하퍼와 윌튼’, ‘핑커튼 양의 대재앙’은 스파크 특유의 유머와 재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각기 여성 참정권 운동의 시대와 내부 갈등, 남자의 말과 여자의 말이 서로 다른 무게를 갖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검은 선글라스’, ‘포토벨로 로드’는 규명되지 않은 폭력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두 여성 주인공이 작은 균열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그린다. ‘이교의 유대 여인’, ‘오르몰루 시계’는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스파크의 문학적 응답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운전기사 없는 111년’은 거짓 자서전에 실린 가족사진을 소재로 삶에 깃든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스파크의 여성 인물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전형성을 뒤집는 그녀의 작품은 독자에게 말끔히 해석되지 않는 잔상을 남겨 그 의미가 무엇일지 고민하게 한다. ‘운전석의 여자’에 나오는 “Q 샤프 장조”라는 표현은 줄곧 스파크 작품의 특징을 절묘하게 포착한 말로 여겨졌다. 존재하지 않는 음계인 Q 샤프 장조로 연주되는 다채로운 여성 서사에 주목한다면 동시대의 여성 서사와는 또 다른, 색다른 문학적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